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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도는 강물에도 다 씻기지 못한 단종의 눈물

김용주 시인 2010. 7. 11. 12:59

휘도는 강물에도 다 씻기지 못한 단종의 눈물


왕위에서 쫓겨난 단종이 영월로 유폐돼

처음 머물던 청령포는 한쪽만 빼고는 모두 서강 물줄기가 가로막고 있는 강변이다.

 그곳에서 어린 단종은 두려움에 떨며 밤마다 흐느껴 울었다.

오늘도 강물은 '단종애사'의 슬픈 사연을 기억하고 있는 청령포를 말없이 적시고 흘러가는데….

1457년(세조 3)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내몰려 처음 머물렀던 청령포.

서강 물줄기가 육육봉을 크게 휘감고 돌아가는 청령포는 뒤로는 험한 암봉이 앞으로는

깊은 강물이 가로막고 있어 절해고도에 뒤지지 않는 유배지였다.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유폐된 영월 청령포

이곳을 단종의 유배지로 고른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세종의 총애를 받던 신숙주다.

김종서,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을 지켜달라는 세종의 고명을 받들어야 했던

신숙주는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비로서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단종을 억압하는 데 앞장섰다. 1452년(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신숙주가 수행한 인연으로 둘 사이가 급격히 가까워졌던 것이다.

서강을 끼고 휘돌아 가는 청령포는 한폭의 산수화다.

육육봉의 기암과 짙푸른 솔밭, 강변의 백사장이 한데 어우러진 풍광은 빼어나다.

유배지가 아니라 은퇴한 사대부가 은거하기 좋은 정취가 감돈다.

그리하여 21세기 나그네는 청령포의 아름다운 풍광에 마음을 빼앗기겠지만,

15세기 중반에 이곳으로 유폐된 어린 임금에겐 너무도 고독하고 절망적인 장소였을 것이다.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은 1457년 6월22일 경복궁을 출발해

여주와 원주를 거쳐 7일만인 28일에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강으로 둘러싸인 섬 아닌 섬에 갇힌 어린 소년은 남몰래 흐느꼈다.

 단종의 유배 생활을 지켜보았고(觀), 오열하는 소리(音)를 들었다는

 관음송(觀音松)은 600여년의 세월을 하루 같이 오늘도 그렇게 청령포를 지키고 있다.

단종이 이 나무의 갈라진 가지에 올라 시름에 잠겼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민간에서 꾸민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린 임금의 따뜻한 체온을 느껴봤을 관음송에게 말을 걸면

왠지 당시 어린 임금의 슬픈 사연을 들려줄 것만 같다.

청령포 솔숲의 단종어가엔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를 복원해 놓았다.

 또한 소나무 울창한 숲엔 관음송 외에도

단종을 유폐했을 때 접근하지 말라고 세운 금표비(禁標碑), 단종이

서낭당을 만들 듯이 쌓았다는 돌탑(망향탑) 등이 남아 있다.

장맛비로 물이 넘치자 읍내 관풍헌으로 이송

하늘도 어린 소년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한 듯

그해 여름 장마는 매우 지독했다.

큰물이 들어 청령포 단종어가까지 넘치자

단종은 두달 만에 영월 읍내의 관풍헌으로 이송됐다.

어린 소년은 점차 조여드는 운명이 두려워 몸을 떨면서도

매죽루에 올라 시를 한편 읊는다.

달 밝은 밤에 두견새 슬피 울 제

시름 못 잊어 누대에 머리 기대니

울음소리 하도 슬퍼 나 괴롭구나

네 소리 없다면 내 시름 잊으련만

세상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단종의 자규사(子規詞)'
아슬아슬 위태롭게 이어지던 단종의 운명은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경상도 순흥에서 일으킨 두번째 복위운동이 발각되면서
마지막을 향해 내달린다.

 신하들은 단종의 목숨을 빼앗기를 강력히 청했다.

세조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세조의 명을 받은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영월 관풍헌을 찾았을 때

단종은 보이지 않았다.

금부도사는 단종을 찾을 생각도 않고 울고만 있었다.

이때 단종을 찾아낸 하인이 갑자기

단종에게 달려들어 활시위로 단종의 목을 졸라 죽이니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금부도사 왕방연은 돌아가는 길에 청령포를 바라보며 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곤 시조를 읊었다.

청령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솔숲엔 그가 읊었던 시조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은님 여희옵고
내마음둘 듸업셔 냇가의 안쟈시니
뎌 물도 내안 갓도다 울어 밤길 예놋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단종의 시체는 서강과 동강이 만나는 강변에 버려졌지만

후한이 두려워 아무도 가까이 가려하지 않았다.

이에 평소 충성심이 지극했던

호장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며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동을지산 중턱에 묻고 밤마다 남몰래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그 후 59년이 지난 1516년 묘를 찾아 봉분을 갖추게 됐다.

 이후 조정에선 단종의 복위 이야기가 이따금 나왔으나

왕실 정통성 문제와 얽혀있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숙종 대인 1698년에 이르러서야 단종으로 복위됐고 무덤은 장릉(莊陵)으로 봉해졌다.

뺨을 스치는 한줄기 바람, 발에 걸리는 돌멩이 하나에도 단종의 넋이 깃들어 있는 영월.

요즘도 이 고장을 찾는 이라면 누구나 장릉에 들러 예를 갖춘다.

장릉 주변의 쭉쭉 뻗은 소나무들마저

봉분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장릉엔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도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