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좋은글

한국 6.25 전쟁

김용주 시인 2010. 4. 24. 08:22

6.25 전쟁은 400만여명의 인명피해와 1.000만여명의 이산가족 수많은 상이군인, 전쟁미망인 전쟁고아들이 생겨나고 국토의 80%이상의 국토가 파괴되고, 우리 민족사의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공산세력의 세계 적화 의도를 저지하고 자유를 수호하기위해 헌신한 국내,외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며 아 울러 6.25전쟁의 역사적 의미와 교훈를 후세에 올바로 인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걸쳐 불법 남침함으로써 한국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한달여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어붙이는 등 신속하게 전세를 장악했습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과 원산, 평양까지 탈환하여 곧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장기화될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38도선을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미국과 유엔을 시작으로 휴전문제가 언급되었고, 1953년 7월 27일에 비로소 휴전협정이 서명됨으로써 3년 10개월에 걸친 승리 없는 전쟁은 막을 내린 것입니다.
     


    일본 히로시마 원폭 배경

    연합군의 원자폭탄 투하로 1945년 8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민족은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데올로기 대립의 주역인 열강들에 의해 38선을 기준으로 국토가 분단되면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4차례에 걸친 회담은 우리 민족이 그토록 바라던 즉각적인 통일과 반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신탁통치가 결정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남쪽에는 대한민국 정부, 북쪽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각기 다른 정부를 수립하게 되면서 분단이 고착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반도 신탁통치   남한정부수립   북한정부수립


    과정

    소련의 도움으로 최신무기를 앞세운 북쪽의 통치자 김일성은 한반도를 공산화 시키려는 의지로 1950년 6월 25일 남침하게 됩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으며 한달여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어붙이는 등 신속하게 전세를 장악했습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과 원산, 평양까지 탈환하여 곧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장기화될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38선 경계선   북한군전쟁사열   북한군 남침


    38도선을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미국과 유엔을 시작으로 휴전문제가 언급되었고 1951년 7월, 개성에서 1차 회담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성이 38선 이북에 있다는 점을 이유로 유엔군측은 새로운 회담장소를 원하게 되었고 이에 소련군측은 유엔군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1951년 10월, 판문점이 새로운 회담장소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로써 한반도는 민족의 동의 없이 분단된 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비무장지대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중공군의 개입   휴전회담 첫날
     

    1950년
    6.25 북한군 남침
    북한군 남침전쟁   북한군 도심 진입   북한군 남침의 행렬
    6.26 유엔안보리, 북한군 섬공중지 결의
    6.27 미국, 극동 해.공군의 한국지원 명령
    6.28 한강교 폭파, 서울 실함, 유엔안보리 군사원조 결의
    한강철교 폭파   북한군탱크서울진입   유엔안보리회의
    6.29 맥아더원수, 한강방어선 시찰
    7.5 미 스미스특수임무부대, 북한군과 최초 접전
    북한군과의 전투중   북한군과의 대치   전투장면
    7.15 이승만대통령, 한국군작전지휘권 이양
    7.20 대전 실함
    8.1 미 제8군사령관,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 명령
    피난하는 난민   피난행렬   낙동강으로 후퇴하는 군인들
    8.5 북한군의 8월 공세 시작
    8.16 B-29폭격기, 융단폭격
    8.31 ~ 9.8 인민군의 9월 공세
    9.15 인천상륙작전
    9.28 서울 수복
    10.1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10.10 국군, 원산 탈환
    10.19 국군-유엔군, 평양 탈환
    10.24 유엔군 총공세 개시
    유엔군의 북진   유엔군의 북진낙하   유엔군의 포사격
    10.25 중공군, 제1차공세 개시
    10.26 국군, 압록강 초산 도달
    11.21 미 제10군단, 두만강 혜산진 진입
    11.24 유엔군, 최종공세 개시
    12.14 ~ 12.24 국군.유엔군, 흥남철수작전
    중공군의 개입   죽음의 피난민 행렬   피난민의 고통

    1951년
    1.4 1.4후퇴, 서울 피탈
    1.14 국군.유엔군, 평택-삼척의 신방어선으로 철수
    3.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4.12 맥아더원수 해임, 리지웨이장군 유엔군사령관 임명
    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7.10 개성에서 휴전회담 개시
    정전회담이 열렸던
    내봉동장외경
      정전회의 북한측대표   정전회담이 열린
    첫날의 회담장
    10.25 휴전회담장 판문점으로 이동
    10.28 군사분계선 설정 합의
    군사분계선 위치를 협의중   군사분계선의 위치를 토의중   휴전선을 긋는 순간
    12.18 쌍방 포로명단 교환

    1953년
    4.20 부상병 포로교환
    포로 송환   포로가 된 중공군 병사   포로가 된 북한병사
    6.8 포로송환문제 타결
    6.18 이승만대통령, 반공포로 석방
    7.27 휴전협정 조인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김일성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유엔군사령관
      정전협정서를 서명하는
    양측대표
     


    상황 내용
    북한군의 남침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웅진반도에서 시작된 전쟁은 곧 38선을 연하여 동쪽으로 확대되었다.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북한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한군을 격파하며 개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는 등 신속하게 전세를 장악했다.
    유엔군 참전 미국은 6월 26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로 규정하였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회원국들에 대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조치를 추후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인천상륙작전 한달여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게되자 연합군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15일 서울에 진입하게 된다. 서울을 완전히 회복한 뒤에는 38도선을 지나 원산, 평양까지 탈환하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중공군의 개입 유엔군의 공세가 가속화되자 중공군이 개입하게 되어 전세는 다시 역전이 되고 장기화활 조짐이 나타났다.
    1.4후퇴 중공군의 원조에 힘입은 북한군은 다시 38선을 넘어 남진하였다. 이때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겨나게 되었다.
    정전제의와 휴전회담 유엔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유엔연설을 통해 1951년 6월 23일 휴전을 제의하였다. 종전을 원하던 중공과 북한은 휴전을 지지의사를 표명하였고, 미국도 긍정적인 입장을 밝힘으로써 7월 개성에서 정전협상이 시작되었다.
    이후 정전협상이 체결될때까지 38선 부근에서는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판문점 접촉 유엔군사령관은 양측전선 중간지점에서 회담을 가질 것을 제의하면서 판문점이 새로운 회담장소로 결정되었다. 미국의 실질적인 의도는 적을 유엔군 관할지상에 끌어들임으로써 발언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으나 이것은 개성을 잃게 된 원인이 되었다.
    휴전협정 서명
    (1953.7.27)
    전쟁 당사자인 한국을 제외하고 유엔군과 북한군 및 중공군은 전문과 5조 60항의 정전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이로써 3년 1개월 동안 지리하게 이어졌던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여전히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태로 남과 북이 대치되어 있다.

                


    1950년
    6.25 북한군 남침
    6.26 유엔안보리, 북한군 선공중지 결의
    6.27 미국, 극동 해.공군의 한국지원 명령
    7.20 대전 수복실함
    8.1 미 제8군 사령관,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 명령
    9.15 인천상륙작전
    9.28 서울 수복
    10.1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10.19 국군-유엔군, 평양 탈환
    10.25 중공군, 제1차공세 개시
    12.14~12.24 국군.유엔군, 흥남철수작전

    1951년
    6.4 1.4후퇴, 서울 피탈
    6.14 국군.유엔군, 평택-삼척의 신방어선으로 철수
    3.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7.10 개성에서 휴전회담 개시
    10.25 휴전회담장 판문점으로 이동
    10.28 군사분계선 설정 합의
    12.18 쌍방 포로명단 교환

    1953년
    8.20~8.26 부상병 포로교환
    6.8 포로송환문제 타결
    6.18 이승만대통령, 반공포로 석방
    7.27 휴전협정 조인


    휴전협정이 조인된 구 판문점 5월 30일에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한, 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전외국군의 동시철수를 제안하였습니다.

    6월 4일에 공산측은 유엔측의 최종 안에 원칙적 동의를 보내왔고, 6일에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휴전성립 후에 한미방위조약을 교섭할 용의가 있고, 대한군사경제원조를 계속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드디어 6월 8일에는 한국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양측은 포로송환협정에 서명하였습니다.

    1953년 7월 27일에 비로소 휴전협정이 서명 됨으로써 3년 10개월에 걸친 승리 없는 전쟁은 막을 내린 것입니다.

    북한군측 휴전협상
    대표단
      유엔군측 휴전 협상
    대표단
      정전협정서를 서명하는
    양측대표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김일성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유엔군 사령관
      조인된 정전협정문
     

    체결 배경 북괴군의 불법 남침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아군은 1950년 9월 28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 계속 북진하여 1950년 10월 20일 평양을 점령, 통일을 눈앞에 두었으나 1950년 11월 17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유엔군은 오산까지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1951년 1월 15일 유엔군은 대반격 작전을 개시, 1951년 3월 4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1951년 3월 24일에 38도선까지 진격하였습니다.

    1951년 3월 12일 미 제8군 사령관 Ridgeway 장군은 "38도선에서 휴전이 된다면 유엔군의 대승리" 라고 말한 바 있으며, 미국정부도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는 문제를 유보하면서 휴전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1년 6월16일 Trigbri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전의 휴전을 정식제의 하였으며, 6월 27일에는 Gromyko 소련 외무상이 휴전관련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미국 정부는 소련의 제의에 대해 검토 후 휴전회담 가능성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1951년 6월 29일 유엔군 사령관 Ridgeway 장군으로 하여금 휴전을 제의토록 지시를 하달하였습니다.

    미정부로부터 지시를 받은 Ridgeway 사령관은 1951년 6월 30일 방송을 통하여, 공산측에 휴전을 위한 연락관 접촉을 원산항에 있는 덴마크 병원선에서 가질 것을 제의하자, 공산측은 1951년 7월 1일 방송을 통하여 개성에서 접촉할 것을 제의하였습니다.


    체결협정 장소   정전회담 대표
    김남일대장
      체결협정


    쌍방은 2-3회에 걸친 상호방송을 통한 제의를 통하여 1951년 7월8일 개성 북쪽에 위치한 '래봉장'에서 대령급을 대표로 하는 예비회담을 개최키로 합의, 최초의 접촉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비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1951년 7월10일 첫 휴전회담이 개최, 26회까지 개성(래봉장)에서 회담을 갖고 1951년 7월 20일부터 판문점으로 회담장소를 이동, 휴전을 위한 회담이 계속되었습니다. 기간 중에 쌍방은 159회의 본회담, 179회의 분과위원회 회담, 188회의 참모장교 회담, 238회 연락장교 회담등 총 765회의 회담을 갖고 드디어 1953년 7월 25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일시 과정
    1950.10 아시아 및 아랍 13개국이 UN정치위원회에 한국전의 정전을 위한 3인위 설치안 제출3일 정전위원회 발족및 신정전5개항 채택

    * 신정전 5개항

    1. 즉시정전
    2. 영구평화를 위한 휴전중의 행동
    3. 적당한 단계에 외국 군대의 철수
    4. 휴전중 UN의 한국행정 감시
    5. 극동문제 해결을 위한 미영소중공의 회합
    * 상기내용에 대해 소련과 중공의 반대로 인하여 최초의 정전협상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음.
    1951.5 -서울 재탈환('51년 3. 16)후 미국무성 및 국방성은 한국전 휴전문제를 공식거론
    -트루먼 대통령은 참전 유엔군 회원국들과 협의 후 한국전 휴전제의 관련 성명서를 발표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반대 특별담화 발표
    1951.6 -주 유엔소련대사도 한국전의 휴전을 제의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국회 등 우리 민족은 38선상에서의 휴전에는 반대
    1951.7 -유엔측과 공산측의 수정안으로 예비회담이 개최
    -1951년 7월 10일 제1차 정전회담 개성서 개최
    *유엔군측은 한국전의 정전 및 차후 이의보장에 대해 토의할 것을 언급하는 한편 공산군측은 38선의 군사분계선화 및 외국군의 철수를 주장, 정치적 문 제등으로 일관함.
    1951.10 -유엔측이 회담장소 이전의사를 밝히자 소련측이 판문점 지역을 제안
    -연락장교단 접촉을 판문점 근방에서 가진 후 새로운 회담장소로 판문점을 정하게 됨.
    *판문점의 원래 지명은 “널문리“인데 이를 중국어 표기에 용이토록 하기 위하여 판문점으로 개칭함.
    1951.11 합동분과위원회에서 쌍방 수석대표는 현전선을 잠정적으로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전투를 중지할 것이 합의되었으며 이 결과 서부지역에서 개성과 장단평야 일부가 공산측에 넘어가게 됨
    1951.12 포로 석방과 관련된 문제 제기
    *유엔측 : 쌍방의 전포로 석방
    *공산측 : 쌍방 포로 전체를 일괄 교환
    -> 포로의 자유 송환시 공산측 포로들이 송환을 거부할 것이 예상되며 그 결과로 차후에 전선의 북괴군이 자진해서 유엔군에 투항할 것을 염려하여 포로의 일괄 송환을 주장함.
    1952.12 유엔에서 포로처리 문제에 대한 인도안이 가결됨(찬성54, 반대5)
    *인도안 주요 내용
    -중감위 체코, 폴란드, 스웨덴, 스위스 대표로 포로송환위원회 구성
    -포로 송환을 반대하거나 강제 송환 금지
    -포로 전원은 비무장지대로 이전, 송환위원회 인도
    -송환을 불 원하는 포로들은 휴전성립 90일 후에 정치회담에 이관
    1953.5 쌍방 포로인원 송환 실시
    -아측 인수인원 : 784명
    -북측 인수인원 : 663명
    1953.7 유엔측 사령관, 북한군 총사령관 김일성, 중공지원군 사령원 간의 한국전 휴전협정에 서명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서언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하기의 서명자들은 쌍방에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충돌을 정지시키기 위하여서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할 목적으로 하기조항에 기재된 정전조건과 규정을 접수하며 또 그 제약과 통제를 받는데 각자 공동 상호동의한다. 이 조건과 규정들의 의도는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며, 이는 오직 한국에서의 교전 쌍방에만 적용한다.

    제 1조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제 2조 停火 및 停戰의 구체적 조치 제 3조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
    제 4조 쌍방 관계정부들에의 건의 제 5조 부칙  
    제 1조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맨 위로]
    제 2조 停火 및 停戰의 구체적 조치 [맨 위로]
    제 3조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 [맨 위로]
    제 4조 쌍방 관계정부들에의 건의 [맨 위로]
    제 5조 부칙 [맨 위로]




    전투병력 파견국

      국명 참전연인원(명) 지상군 해군 공군
    미국 1,789,000 보병사단 8
    해병사단 1
    연대전투단 2
    병력 302,483명
    극동해군
    미 제7함대
    극동공군
    영국 56,000 보병여단 2
    해병특공대 1
    병력 14,198명
    함정 17척
    (항공모함 1척포함)
    -
    오스트레일리아 8,407 보병대대 2
    병력 2,282명
    항공모함 1척
    구축함 2척
    프리킷함 1척
    전투비행대대 1
    수송기편대 1
    캐나다 25,687 보병여단 1
    병력 6,614명
    구축함 3척 수송기대대 1
    네덜란드 5,322 보병대대 1
    병력 819명
    구축함 1척 -
    뉴질랜드 3,794 보병대대 1
    병력 1,389명
    프리킷함 1척 -
    프랑스 3,421 보병대대 1
    병력 1,119명
    (1,185)
    구축함 1척 -
    터키 14,936 보병여대 1
    병력 5,455명
    - -
    필리핀 7,420 보병대대 1
    병력 1,496명
    - -
    태국 6,326 보병대대 1
    병력 1,294명
    (2,274)
    프리킷함 7척
    수송선 1척
    수송기편대 1
    그리스 4,992 보병대대 1
    병력 1,263명
    - 수송기편대 1
    남아프리카 공화국 826 - - 전투비행대대
    에티오피아 3,518 보병대대 1
    병력 1,271명
    - -
    콜롬비아 5,100 보병대대 1
    병력 1,068명
    프리킷함 1척 -
    벨기에 3,498 보병대대 1
    병력 900명
    - -
    룩셈부르크 83 보병소대 1
    병력 44명 (48)
    - -


    의료지원국

      국명 참전연인원(명) 근무인원(명) 지원부대 및 시설
    스웨덴 160 154(162) 적십자병원
    인도 627 70(333) 제60야전병원
    덴마크 630 100 병원선
    노르웨이 623 105(109) 이동외과병원
    이탈리아 128 72 제68적십자병원


    피해 현황

    구분 전사/사망 부상 실종 포로
    총계 178,569 555,022 28,611 14,158 776,360
    한국 137,899 450,742 24,495 8,343 621,479
    미국 36,940 92,134 3,737 4,439 137,250
    영국 1,078 2,674 179 977 4,908
    오스트레일리아 339 1,216 3 26 1,584
    네덜란드 120 645 - 3 768
    캐나다 312 1,212 1 32 1,557
    뉴질랜드 23 79 1 - 103
    프랑스 262 1,008 7 12 1,289
    필리핀 112 229 16 41 398
    터키 741 2,068 163 244 3,216
    태국 129 1,139 5 - 1,273
    그리스 192 543 - 3 738
    남아프리카 공화국 34 - - 9 43
    벨기에 99 336 4 1 440
    룩셈부르크 2 13 - - 15
    콜롬비아 163 448 - 28 639
    에티오피아 121 536 - - 657
    노르웨이 3 - - - 3




    미국
    참전비

    위치 파주시 문산읍
    건립일자 1975.10.3
    기념일 7. 5 (오산전투 기념일)

    비문내용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기간(1950∼1953)동안 미국의 아들들이 바친 고귀한 희생과 빛나는 업적을 기르고 그들의 영령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여기에 비를 세워 기념하노라.

    한.미 해병 참전비

    위치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산
    건립일자 1958. 9. 28('84. 9. 20. 재건립)

    건립취지

    한.미연합 해병대가 한강 도하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는데 빛나는 공헌을 세웠으므로 이를 기리기 위하여 1958년 9월 28일 전첩비를 건립하였으며, 1984년 9월 20일 해병대 사령부가 다시 재건립하였습니다.

    미 제 2사단 참전비

    위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건립일자 1981. 11. 24

    건립취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이국 땅에서 싸우다 전사한 미 제 2사단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과 빛나는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하였습니다.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

    위치 파주시 조리면
    건립일자 1964. 4. 15('84.10. 재건립)

    건립취지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 해병과 한국 해병들의 넋을 추모하고 그들의 공훈을 길이 빛내기 위하여 해병대 사령부가 옛 격전지인 이곳에 이 비를 건립하였습니다.


    영국
    참전비

    위치 가평군 가평읍
    건립일자 1967. 9. 10

    건립취지

    영연방 제 27여단은 1951년 4월 23일과 24일 가평 북방 7km 지점에 위치한 죽둔리에서 중공군 제1차 춘계공세를 좌절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유엔군 참전국 협회와 가평군은 6.25전쟁에 참전하여 영연방군이 세운 전공을 기리고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설마리 전투비

    위치 가평군 가평읍
    건립일자 1967.9.10

    건립취지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영국군은 설마리 계곡에서 공산군의 포위속에서 자유수호를 위하여 싸웠습니다. 글로스터셔 연대의 제1대대와 제170 경박격포 소대장병들은 많은 희생을 당하였으며, 이들의 넋을 위하고 영웅적 공적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하였습니다.


    캐나다
    참전비

    위치 경기도 가평군 북면
    건립일자 1983.12.30

    건립취지

    캐나다는 6.25전쟁에 다섯번째로 전투부대를 파견한 국가로서 지상군, 해군, 공군을 모두 파견하였습니다. 특히 PPCLI 제 2대대는 가평 677고지에서 용감하게 싸워 중공군의 4월 공세를 저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들이 싸운 공을 기리며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흥천 지구 전투전적비

    위치 홍천군 홍천읍
    건립일자 1957. 3. 15

    건립취지

    캐나다 제2대대는 1951년 3월 7일 홍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11일 양덕원리 부근의 중공군을 격퇴하여 아군이 중부전선을 확보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이 전적을 기념하고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하였습니다.


    태국
    참전비

    위치 포천군 영북면
    건립일자 1974. 10. 1
    기념일 11. 7 (9-11월 참전기념일)

    비문내용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태국의 육.해.공군 용사들! 여기 그들의 마지막 주둔지에 피흘린 130명의 뜻을 같이 새긴다.

    38도선 돌파 기념비

    위치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
    건립일자 1951. 5. 28

    건립취지

    6.25전쟁 당시 태국 제21보병연대 제1대대 장병들의 자유수호와 38선 돌파작전의 무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 70전차부대 제191소대에서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프랑스
    참전비

    위치 경기 수원시 장안구
    건립일자 1989.3.16

    비문내용

    불가능은 없다는 신념을 가진 나폴레옹의 후예들! 세계의 평화와 한국의 자유를 위해 몸바친 269명의 고귀한 이름 위에 영세 무궁토록 영광이 있으리라.


    호주
    참전비

    위치 가평군 북면 목동리 691-1
    건립일자 1963.4.24(83.12.27 재건립)

    건립취지

    호주는 세계평화를 위하여 육.해.공군을 모두 파병하였습니다. 이들의 6.25전쟁 참전을 기념하고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3년 4월 24일 유엔 한국 참전국 협회에서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현재의 기념비는 1983년 12월 27일 재건립되었습니다.


    터키
    참전비

    위치 용인군 성면 동백리
    건립일자 1974. 9. 6

    건립취지

    터키는 1950년 10월 17일 1개 보병여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여단은 참전초기 군우리 전투에서 고전하였으나 금양장리 전투와 장승천 전투, 네바다 전투에서 선전하였습니다. 국방부는 이들의 업적을 기리고 산화한 장병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그리스
    참전비

    위치 여주군 가남면 오산리
    건립일자 1974.10.3

    비문내용

    행복은 자유 속에 있고 자유는 용기 속에 깃든다는 신념을 가진 그리스의 용사들! 정의를 위해 몸바친 186명의 고귀한 생명 위에 영광이 있으리!


    남아프리카공화국
    참전비

    위치 평택시 용이동
    건립일자 1975.9.29

    비문내용

    자유와 국가간의 친선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높은 이상이요, 자랑스런 유산이다. 이들이 치른 큰 희생은 영원한 격려이어라.


    네덜란드
    참전비

    위치 횡성군 우천리
    건립일자 1975.9.29

    비문내용

    충성과 용기로써 신조를 삼는 오렌지공의 억센 후예들! 붉은 침략자와 싸우다가 피를 흘린 124명의 고귀한 희생자들! 우리는 그들의 명복을 빌고, 또 빛나는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기에 비를 세운다.

    원주지구 전투전적비

    위치 강원도 원주시 태장2동
    건립일자 1954. 3. 15

    건립취지

    6.25전쟁 당시 전략요충지인 이 원주지구에서 인해전술로 침략하여 오는 중공군 제66군과 북한군 제5군단에 대항하여 이들을 물리친 우리 국군 제3사단, 제 5사단, 제 8사단과 미 제 2사단, 제1해병사단 그리고 네델란드 및 프랑스군의 용감했던 발자취를 기리고, 전사한 영령들의 명복을 빌고자 1954년 3월 15일 1군 사령부에서 이 전투 전적비를 건립하였습니다.

    오우덴 중령 현충비

    위치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건립일자 1966. 10. 12

    건립취지

    네덜란드군은 1951년 2월 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지구전투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장병들의 희생도 있었습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파견되어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 산화한 오우덴 중령과 장병들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8년 6월 제 1군사령부에서 이 현충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뉴질랜드
    참전비

    위치 가평군 북면 목동리
    건립일자 1988.9.23
    기념일 4. 21(가평전투 추도식)

    비문내용

    "유엔" 헌장의 숭고한 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복무한 모든 "뉴질랜드" 용사들의 공헌을 기념한다.(1950-1955)

    흥천 지구 전투 전적비

    위치 홍천군 홍천읍 연봉리
    건립일자 1957. 3. 15

    건립취지

    1950년 12월 13일부터 1951년 5월 20일까지 전개된 홍천지구 전투에서 국군 제3, 제5, 제8사단과 미 해병 제1사단 및 캐나다, 뉴질랜드 부대의 장병들이 북한군 제5군단과 중공군 제63군을 맞아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중부전선을 확보할 수 있었던 전공을 기념하고 이 전투에서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이 비를 건립하였습니다.


    에디오피아
    참전비

    위치 춘천시 근화동
    건립일자 1968. 5. 7

    비문내용

    자유수호를 위하여 한국전쟁 중 이 땅에서 공헌한 영웅적인 "에디오피아" 제국의 용사들에게 바친다.


    콜롬비아
    참전비

    위치 인천시 서구 가정동
    건립일자 6. 25

    비문내용

    카브리 바다의 정기를 타고난 콜롬비아 용사들! 국제연합의 깃발을 높이 들고 평화를 위해 싸우다가 마침내 213명의 고귀한 생명의 피를 흘렸다. 우리는 그들을 길이 기념하고자 여기에 비를 세운다.


    필리핀
    참전비

    위치 인천시 서구 가정동
    건립일자 1975. 9. 24
    기념일 4. 22 (율동전투 기념)

    비문내용

    태양같이 밝고 불타는 정열의 기상을 지닌 삼성좌의 용사들!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피 흘린 112명의 고귀한 영혼을 위해 하느님의 가호가 영원하리라.

    율동리 전투 전적비

    위치 경기도 연천읍
    건립일자 1966. 4. 22

    건립취지

    율동리 전투(1951. 4. 22~4. 23)는 필리핀군이 6.25전쟁에서 중공군과 치른 전투중 가장 큰 전투였습니다. 연천 북방 5km지점인 율동리에서 중공군 제34사단의 춘계공세를 맞아 끝까지 진지를 고수하여 우측 인접부대의 철수를 성공적으로 엄호하고 유엔군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후방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이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건립하였습니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참전비

    위치 동두천시 상봉암동
    건립일자 1975.9.26

    비문내용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1951년 1월 31일 정의의 십자군으로 파한 되어 용전 분투하다가 1955년 6월 15일 본군으로 개선한 군대이다. 여기 여러나라의 국민들과 후손들에게 그 뜻을 전하고자 그들이 남긴 찬란한 전력과 지휘관들의 이름을 새긴다.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인도, 스웨덴 의료지원단
    참전비

    위치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건립일자 1976. 9. 20

    건립취지

    6.25전쟁 당시 의료지원단을 파견한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다섯 나라의 적십자 정신을 세계만방에 전파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국방부가 이 비를 건립하였습니다.